법률 칼럼

재판의 한계

이응세 2012. 3. 11. 22:18

(다음 글은 법원에서 퇴직하기 전, 정확히 말하면 퇴직을 마음먹기 전에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당연히 법관의 시각으로 썼습니다. 그러나 변호사가 된 지금 보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글이어서 일부분을 조금 추가해서 이 쪽으로 옮겨 놓습니다)

재판은 다투어지는 사건에 관하여 사실인정을 하고 거기에 법률적인 판단을 함으로써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사실인정,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팩트를 가려내는 일 또는 밝히는 일은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재판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재판과정에서 객관적인 진실이 모두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범위를 재판당사자로 국한한다면, 재판과정에서 객관적인 진실 전부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진실만이 밝혀지기를 기대할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진실이 밝혀지고 동시에 자기에게 불리한 진실은 묻혀지기를 바라며 혹시라도 자기에게 유리한 허위사실까지 인정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각설하고, 재판과정에서 그 사건을 둘러싼 객관적인 진실이 모두 밝혀지기를 기대하는게 정상이고, 재판의 이상적인 모습이겠지만, 재판에는 객관적인 진실을 100% 밝혀내기 어려운 세 가지의 한계가 있다.

 

첫째, 재판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다룬다.

하루이틀 전의 일이 아니라 최소한 몇 달 전의 일을 다룬다.

재판에서 사용되는 증거들은 서류이건 증인이건 과거를 기록한 것이다.

사람의 기억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서 나타나 있다.

실제 법정에서는 여러 유형의 증인들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진술이 거짓임을 알면서 허위증언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객관적 증거에 명백히 배치됨에도 자신의 진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양심범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다. 

취약한 증거들을 가지고 과거의 일을 재구성하기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둘째, 좋은 증거들이 있더라도 법정에 제출되어 판사가 이를 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민사재판은 원고와 피고 각 당사자가 제출하는 증거만으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증거가 제출되지 않았을 때 판사가 어떠어떠한 증거를 제출하라고 권유하는 일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정도를 넘어서면 오히려 불공정한 재판이 된다.

 

변호사의 중요성은 이 지점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재판에서 변호사가 하는 일이 법정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일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건에서 자기측 당사자에게 유리한 주장과 증거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정리해서 제출할 수 있는지 여부가 많은 사건에서 판결의 결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형사재판은 민사재판보다는 당사자의 역할에만 기대지 않고 객관적 진실을 찾아야 하는 시스템이지만 이 역시 증거를 제출하는 일은 검사와 변호인(피고인)이 하는 일이지 판사가 하는 일은 아니므로, 유효적절한 증거가 제출되지 않음으로써 객관적 진실을 발견할 수 없는 제약이 생길 수 있다.

 

법정에서 피고인이나 원,피고가 답답한 마음에 호소한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알고, 저 쪽도 안다고...

그러나 어쩌랴 판사가 알아야 하는 것을.. 판사가 알 수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셋째, 이제 판사의 역할이 남는다.

나름대로 과거를 충실히 재연하는 증거들이 있고, 그 증거들이 많이 제출되었더라도 판사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훌륭한 사실인정을 못할 수도 있다. 경험과 합리적이고 신중한 사고 등 많은 덕목이 여기에서 필요하다.

 

판사들은 사건 해결을 위해서 당사자가 제출한 (과거를 기록한) 증거들을 이러저리 곱씹어 보면서 사실인정을 한다.

이 작업은 일종의 퍼즐맞추기이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100개의 퍼즐이 필요하다면, 법정에 당사자가 제출한 퍼즐은 대개 100개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제출된 퍼즐조각중 상당수는 찌그러지거나 깨져서 그림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다른 정상적인 퍼즐조각을 맞추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퍼즐조각이 부족한 공간은 판사가 메워야 한다.

그러나 판사에게도 한계가 있는지라 메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페이스북에 썼던 글에서 조금 추가한 문단입니다)

채워진 퍼즐조각이 부족하더라도 판사는 재판을 회피할 수 없다.
주어진 퍼즐만으로 결론을 내주어야 한다.
그래서 민사재판에서 입증책임이라는 중요한 원칙이 있고, 형사재판에서도 약간 양상을 달리하지만 역시 입증책임이 있다.
퍼즐이 부족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독수리인지 솔개인지 구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판사는 다리만 보이거나 부리만 보이는 그림을 가지고 그 그림의 주인공이 독수리인지 솔개인지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평소의 지식과 경험이 중요하다.  

평소에 독수리와 솔개를 구분하는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다면 공부해야 한다. 그냥 추측하지 말고 백과사전을 찾아보고 전문가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결국

어떤 재판에서 사실인정이 객관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이는 첫째, 정확한 퍼즐이 처음부터 부족하거나,

둘째 정확한 퍼즐이 어딘가에 있지만 제출되지 않았거나 동시에 비뚤어진 퍼즐이 제출되었거나,

셋째, 판사가 제대로 퍼즐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또는 생각하는) 객관적 진실과 판사의 사실인정이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을 때,

위의 셋째 부분을 이유로 판사를 비난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첫째와 둘째 부분 때문에 재판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불충분한 퍼즐조각때문에 판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전체 그림을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충분한 퍼즐조각을 가지고 판사가 열심히 노력해서 전체 퍼즐그림의 중요한 부분을 완성해서

합당한 결론을 내렸음에도 사소한 몇 개 퍼즐의 위치가 잘못 되었다는 이유로 판사를 비난하기도 한다.

 

첫째와 둘째 부분의 한계를 최소화하려면 그만큼 판사의 역할과 책임이 크기는 하지만,

재판의 세 가지 한계를 판사에게 고스란히 떠넘기는 일은 부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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