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9. 공연소감입니다.


오늘 한 분의 대가를 만났다.
오후 2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정경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6곡 전곡 콘서트
객석에 앉아 무대를 보니 무대가 휑하니 텅 비어 있어서 낯설다. 정말 무반주네.
바이올린 무반주 콘서트는 처음인데, 재미있을까..


정경화가 느릿느릿 들어온다. 빈 넓은 무대에 혼자 서니 왜소해보인다. 
연주가 시작된다. 소리가 조금 작게 들린다.


그런데 곧 홀에 소리가 꽉 차기 시작한다. 마치 앞서 지나간 음이 없어지지 않고 홀 여기저기를 채우는 듯 하다. 정경화의 모습도 점점 커져 간다.
반주 없이 바이올린 소리만 있으니 음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눈을 감으면 음이 보이고, 눈을 뜨면 정경화가 보인다.


2곡을 마친 후 휴식을 할 때, 엉뚱하게 어제의 변론이 생각난다.
오늘의 연주가 2시간 정도인데, 나도 어제 내리 2시간 10분 동안 한 사람을 위한 최후변론을 했다. 법정안 사람들을 나름 몰입시켰다고 혼자 생각하면서...


점점 몰입도가 높아진다. 객석에서 악장간 헛기침 소리마저 없어졌다.
빠르다가 느리고 느리다가 빠르다. 빠름 다음에 오는 느림이라서 좋고, 느림 다음에 이어지는 빠름이라서 아름답다.
약함과 강함, 경쾌함과 무거음, 옅은 미소와 단오함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내가 곡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같은 선율이 반복되지는 않지만, 변화는 있으되 큰 차이는 아니고, 교향곡 같은 클라이맥스는 없다. 
그러면서 활은 쉼 없이 움직이고 왼손가락은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불현듯 드는 생각, 
이 곡은 우리의 시간을 보여주는 곡이구나. 삶을 말해주고 있구나.
그 오랜 세월을 지켜온 정경화이기에, 손가락 부상을 딛고 일어선 정경화이기에 이 곡을 이렇게 연주할 수 있는 거구나. 젊은 연주자는 이 곡을 연주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68세의 연세에 걸맞게, 무대에 들어오고 나갈 때 비틀거리는 듯이 천천히 걸으시는데, 막상 연주에 들어가더니 악보 없이 2시간 넘도록 홀을 꽉 채우면서 객석을 사로잡은 연주를 하신다. 홀 안의 다른 모든 것들이 멈추어 있는 채 그 분의 움직임과 소리만 있는 광경이다.


연주가 끝난 후 기립박수하는 객석에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너무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두 팔로 큰 하트를 그려서 날려보내는 모습은 덤이다.
정말 벅찬 감동이다. 눈물이 핑 돌려 한다.
아이고 어제 내 변론은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텐데...


집에 있는 그 분의 CD를 찾았다. 87년 발매된 Con Amore, 90년대 초반에 사서 많이 들었는데... 이번에 발매된 바흐 음반의 사진과 비교해본다.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Posted by 이응세

기계와 컴퓨터가 글을 쓰는 시대 

 

저작권법에서 저작물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저작물에 대한 정의에 의문을 품게 만들고 있다. 


저작물의 정의라는 것이 객관적 진리라고 할 수 없으니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저작물의 정의에 의문을 품게 하는 시발점은 단순한 정의의 문제를 넘어 사람들에게 위기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유명한 비즈니스 잡지인 Forbes의 웹사이트에는 Narrative science라는 코너에 글이 지속적으로 게재되는데, 이 글들은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가 쓴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Narrative science 회사의 Quill이라는 프로그램이 쓰는 글들이다.


컴퓨터가 쓴 글이라고 해서 매우 엉성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필자처럼 영어에 능통하지 않는 사람은 이 글을 사람이 썼는지 컴퓨터가 썼는지 구분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컴퓨터가 글을 쓴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08년에 러시아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이 쓴 True Love라는 소설이 발표되었고, 꽤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까레리나의 캐릭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저작물이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컴퓨터가 쓴 글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저작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가볍게 결론지어 버릴 수도 있겠으나, 이는 손쉽게 문제를 피하려는 것일 뿐 해결책은 아니다.

 

컴퓨터가 쓴 글은 전혀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고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혹자는 컴퓨터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글 쓰는데 필요한 틀이나 문체를 사람이 컴퓨터에 입력시키고 컴퓨터는 이를 그대로 사용하였을 뿐이므로,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창작한 저작물이라도 그에 사용되는 언어와 단어는 대부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며,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창작 활동도 지구상에 없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문화유산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바라보는 활동임을 생각한다면, 사람이 쓴 글이라고 해서 컴퓨터보다 항상 우월한 창작성을 갖는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컴퓨터로 인한 저작물, 사회적‧법률적 의미 모호


사람이 쓴 글인지 컴퓨터가 쓴 글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엔씨소프트가 2003년 7월에 발표한 ‘스토리헬퍼’는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쉽게 글을 쓸 수 있도록 기존의 시나리오 데이터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항목별로 본인이 원하는 항목을 선택하면 본인이 원하는 구조의 샘플이 탄생하고, 사람은 이 샘플을 수정하여 자신의 글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 경우 어디까지가 사람이 쓴 글이고 어디까지가 컴퓨터가 쓴 글이며, 어떤 부분은 보호되어야 하고 어떤 부분은 보호될 수 없는 것일까? 컴퓨터의 힘을 빌려 글을 쓰는 상황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창작과 저작물의 사회적, 법률적 의미에 대하여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쓴 글에 창작성이 있는지, 그 글이 저작물로써 보호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학문적 관심보다 더 절실한 고민은 사실 따로 있다.

 

글 쓰는 이들은 글 쓰는 일이야말로 가장 창의적인 작업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산업사회에서 자동화가 인간의 작업영역을 침범하는 흐름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남의 일로 생각하였을 것이며, 체스를 하는 컴퓨터가 인간 체스챔피언과 자웅을 겨루는 것을 보고도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보았을 뿐이다.

 

글쓰기, 컴퓨터와 차별되는 부분 찾아야

 

로봇이 인간을 닮아가는 각종 영화와 소설들을 보면서도 그 로봇의 역할이 창의적인 영역까지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컴퓨터가 신문기사를 쓰고 소설을 쓰는 상황에서 이제 글 쓰는 이들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컴퓨터보다 더 좋은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컴퓨터가 담지 못하는 무엇이 담긴 글을 써야 컴퓨터가 쓴 글들 속에 묻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분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글쓰기에서조차 이제 컴퓨터와 차별되는 부분을 찾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신문기사나 소설이 아닌 다른 종류의 글을 쓰는 이들도 안심할 수 없다. 법률가가 쓰는 판결문이나 준비서면들은 신문기사나 소설과 달리 컴퓨터가 함부로 흉내낼 수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법률가의 글은 한 단어, 한 문장마다 가치판단을 담고 있으므로 절대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하여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충분할까? 기술은 항상 우리의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우리의 일을 대신하여 왔음을 상기하여야 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글 쓰는 이들로서는 우리의 글쓰기를 앞으로도 컴퓨터가 절대 대신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기보다 컴퓨터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훨씬 안전하고 현명한 생각이다. 컴퓨터가 절대 따라할 수 없도록 한 단어 한 문장에 깊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쓴 글에 가치를 담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 컴퓨터의 글쓰기를 두려워하라고 호들갑을 떨기는 너무 앞서나갔다. 차분하게 다시 마음을 다잡아 생각해보면, 글 쓰는 이들이 자신의 글에 자신만의 가치를 담아야 할 필요성은 비단 컴퓨터의 글과 비교될 장래를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글에 가치를 담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고 현재도 계속하고 있지만, 이를 가끔 잊고 있을 뿐이다. 컴퓨터가 글을 쓴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가 가끔 잊었던 것, 자신의 글에 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점을 새삼스레 되새겨 보는 소득을 얻었다. 

 

Posted by 이응세

어제 아직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은 수입영화를 지인 덕택에 시사회에서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원제는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내년 1월 1일 개봉 예정입니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이니, 간단하게만 말하면,

Life 잡지사의 필름작업부서에서 일하는 남자주인공은 가계부를 직접 쓰고 소심하고 여자 친구도 없어서 연인소개 사이트에 자신을 등록한 소시민입니다.

어느 날 사이트에서 호감을 가지게 된 여성이 같은 잡지사에 근무하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침 잡지사가 구조조정을 시작하게 되어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상황에서 숀이라는 유명 사진작가가 보내 온 필름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유명 사진작가는 그 필름에 ‘삷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까지 영화 초반부는 다소 지루한 감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지루한 감이 느끼지 못한 채 영화의 재미에 빠져들게 되고, 영화가 끝나면서 관객들 각자 자신만의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재미는 영상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중반 이후 자연풍광에 인물들이 담긴 장면들이 정말 인상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는데 필요한 첫 번 째 조건은 좋은 피사체입니다. 

그래서 피사체인 자연풍광이 좋기 때문에 영화의 장면들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 초반의 도심지에서 찍은 장면들의 구도나 색감도 다른 영화들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사진들입니다. 

이 영화를 찍은 카메라 감독의 뛰어난 감각으로 도심지이건 자연풍광이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잘 잡아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균형이 제대로 잡힌 장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영화가 끝났을 때의 느낀 점은 이렇습니다.

 

누군가에게 삶은 평범하고 지루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가 있으면 그 삶은 흥미롭게 바뀔 수 있다. 

그 계기는 자신이 세운 계획을 따라서 찾아오기보다 외부의 상황으로 우연히 찾아오기 십상이지만, 그 순간이 왔을 때 그 계기를 변화의 시점으로 잡을 지는 자신의 몫이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으로 어떤 변화가 뒤따라 올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것에 스스로 자신을 던질 뿐이다. 

많은 망설임 끝에...

 

살아가면서 가끔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 변화를 꾀하려면 대개 어떤 계기가 필요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계기를 직접 계획하고 만들어 나가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낯선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를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 비록 짧지 않은 고민을 거치겠지만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길로 자기를 들여놓는 첫 걸음이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자기가 내딛는 첫 걸음이 어디에서 끝날 지까지 너무 깊숙이 생각하면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없지요.

그리고 보면 이 영화의 초반부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 것은 주인공의 삶이 평범하고 지루했기 때문이겠고, 중반 이후에 영화가 재미있어 진 것은 주인공의 삶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이니, 영화의 전개도 주인공의 삶처럼 변화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생각해보니 이 영화는 뜻밖에 상당히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삶의 정수를 담았다는 그 사진을 보면 알게 됩니다.

삶의 정수는 새로운 어떤 것,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어떤 것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에 있었습니다.

소심하고 특별한 경험도 없어서 연인소개 사이트에서도 인기가 없었던 남자주인공이 다양한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그 에피소드 덕분에 연인소개 사이트에서도 인기가 높아졌지만, 그 인기는 정작 남자주인공에게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의 가치는 그의 삶 안에 있었으며 그가 원했고 실제 얻는 것은 그의 주위에 이미 있었습니다.

삶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고, 다만 그 가치를 느끼고 찾는 데에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며 그 계기를 통하여 스스로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자세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요?

 

영화에서 Life 잡지의 motto라고 소개한 긴 문구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실제 Life 잡지가 창간될 당시의 motto는 While there's life, there's hope 라고 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긴 모토보다 창간 당시의 실제 모토가 영화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응세 변호사


Posted by 이응세

어느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신부님은 알콜중독을 비롯한 각종 중독자들이 중독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다.

놀랍게도  그 분 자신이 한 때 알콜중독상태에 빠져 있었고, 1년간 폐쇄병동에서 치료까지 받았다고 한다. 심상치 않은 신부님의 경력(?)에 잠시 놀란 후 생각해보니, 그 분의 말씀과 도움을 접하는 중독자들은 훨씬 더 마음의 평안을 얻고 중독 상태에서 잘 빠져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독의 경험이 있는 분이 중독자의 심정을 잘 알고 길을 잘 인도해줄 수 있을 터인데, 하물면 그 분이 신부님이라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일게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힘이 되어 준다면 그 사람의 삶은 의미있는 삶일 것이다. 그가 사랑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좁게는 자기 자신일테고, 더 나아가 가족일테고, 친구와 주위 사람들로 그 범위가 점점 커져 가겠지.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반드시 많아야 할 것인가.

중독자를 위한 그 신부님이 중독자들에게 주는 사랑과 용기는 그 어느 성직자의 그것보다 더 본인에게 진실하고 중독자에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성철 스님처럼 많은 사람에게 위안과 용기를 줄 수는 없을 터.

자기의 상황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 수의 적고 많음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큰 위안과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Posted by 이응세


이 글은 2012. 2 15. 법원을 사직하면서 퇴임식장에서 말하고, 법원의 지인들께 메일로 보내드렸던 사직인사입니다.

새삼스레 사직인사를 블로그에 올리는 이유는, 이 글을 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는데다가, 이 글이 비록 과거에 대한 인사이지만 미래에 대한 내 자세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 직 인 사


법원가족 여러분들께 법원을 떠나는 마지막 인사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2월 16일자로 법원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1년 3월 제가 법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뒤 어느덧 21년이 지났습니다.

그 21년은 저에게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21년 동안 행복하게 그리고 대과없이 법관생활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일 배우기 바쁘던 배석판사 시절부터 제 주위에는 따뜻하게 저를 이끌어주시면서 법관의 자세를 일깨워주시던 선배 법관들이 계셨습니다.

분에 넘치는 엄청난 권한을 가졌으면서도, 그 권한이 왜 나에게 주어졌는지, 그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여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단독판사 시절을 돌이켜보면, 선배 법관들과 함께 항상 저를 자극하고 일깨워주던 동료법관들이 기억이 납니다.

부장판사가 된 이후에는 배석판사들을 비롯한 후배법관들이 보여주는 진지한 자세와 열의가 저에게 초심을 자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21년 동안 각급 법원에서 함께 했던 재판부 직원분들이 가까운 곳에서 조용하게 저를 도와주고 지켜주셨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성함을 일일이 올릴 수 없지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서 항상 저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던 제 아내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내의 응원이 없었다면 제 법관생활이 과연 행복할 수 있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어부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지 아는가?”

저는 대답했습니다.

“고기를 가득 잡아 만선으로 돌아올 때 행복하겠지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습니다.

“만선의 행복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행복일거야.

어부는 뱃전을 떠나지 않고 뱃전에 머물러 있을 때 행복한 것이라네.

어부가 만선일 때만 행복을 느낀다면 어찌 어부생활을 오래할 수 있겠나.”


그 대답은 제 머릿속을 때린 후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지난 법관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어부가 뱃전에서 행복을 느끼듯이, 저는 법관에게 부여된 권한을 조심스럽게 행사하면서 대체로 행복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제가 얼마나 많은 고기, 얼마나 큰 고기를 잡았는지를 제 행복의 기준으로 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법관으로서 재판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기보다 담당하는 사건의 경중이나 제가 맡은 직책에 더 큰 의미를 두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 깊숙하게 반성했습니다.

비록 뒤늦은 깨우침이자 반성이기는 하지만, 만선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이 깨우침을 저는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법원이라는 큰 배에서 내리려 합니다.

오늘 이후부터 저는 그 동안 법원이라는 뱃전에 머물면서 누리던 그 행복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세상을 더 이상 그 뱃전에서 바라볼 수도 없을 겁니다.

다행히 뱃전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뱃전에서 바라보던 세상을 이제는 물에서 바라보려 합니다. 

파도가 얼굴을 때리고 앞을 가리기도 하겠지요. 

조금은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뱃전에서 바라보는 세상과 물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이 법원에서 배우고 깨쳤던 가치와 교훈들이 앞으로도 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밝은 등대가 되어 주고, 파도치는 물에서도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보도록 만들어 주리라고 믿습니다.


일전에 우리 법원장님께서 ‘떠나는 사람은 자기 뒷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남아 계신 분들에게 보이는 제 뒷모습이 어떠할지를 저는 이제 퇴임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궁금해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제 뒷모습에서 티끌이나 얼룩이 보이더라도 먼저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티끌이나 얼룩이 있음을 애정을 가지고 저에게 일러주시면 더 큰 발전의 계기로 삼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법원가족 여러분

그동안 제게 주신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와 함께 다음에 만나 뵙자는 말씀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 2. 15.


이 응 세 올림

 


Posted by 이응세
 

  오늘 아내와 함께 영화 블랙 스완을 보았다.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와 흑조에 관한 스토리에서 비롯된 영화이면서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점 외에 자세한 내용을 모른 채 보게 되었는데, 기대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영화는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느슨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다. 상영이 끝나고 많은 관객들이 자리에서 매우 천천히 일어났다는 점에서 여느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 영화가 끝났음을 실감하지 못하기도 하고, 끝났음을 알면서 여운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았다.


  발레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으로 선택되어 연습을 시작한 발레리나 니나는 단장으로부터 자신이 백조의 역할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으나 자신이 소화해야 할 흑조가 보여주어야 할 사악함과 관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니나는 역시 발레리나였으나 딸을 키우기 위하여 그 길을 접은 어머니의 관리를 받으면서 착하고 여린 심성으로 자라온 터라 흑조의 사악함과 관능을 그 내면에서 끌어낼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발레단에 새로 합류한 다른 발레리나가 자유분방하고 관능적이어서 흑조의 역할에 적합하게 보이면서 니나는 주인공 배역을 그녀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영화는 니나와 그 어머니 및 다른 발레리나와의 긴장관계를 주로 담고 있으나 사실은 그 대부분이 니나가 스스로 겪는 심리적인 과정을 담고 있는 것이었는데, 관객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인지 다소 혼란스러운 가운데 영화의 끝을 맞게 된다. 어쨌든 영화는 주인공 니나가 겪은 심리상태를 현실과 함께 섞어 훌륭하게 표현함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시킨 수작이었다.


  발레를 보고 나니 얼마 전에 읽은 신문칼럼이 생각났다. 그 신문칼럼을 보면, 요즈음 한창 뜨고 있는 TV드라마 “사인(Sign)"의 주인공 박신양은 그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100구가 넘는 시체 부검을 참관하고 전국의 법의학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그처럼 철저하게 배역을 공부하는 것은 그의 양심이며,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평생 이 일을 하는지를 모르면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이는 진정 프로다운 자세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럼니스트는 배우 고현정의 연기철학을 듣고 그녀의 연기에 대한 자세가 더 고수라고 느낀 듯 하다. 고현정은 한 인터뷰에서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을 직접 경험해보고, 그 경험을 토대로 연기한다는 것은, 평상시 몸과 마음을 닫아놓은 것이다. 배우는 척추를 다 확장시켜 상상력으로라도 우주와 대화하고, 역할을 맡으면 남김없이 그 사람으로 훌훌 왔다 갔다 한다. 그러려면 선입관이 전혀 없이 열린 상태, 늘 말랑말랑한 상태라야 한다. 좋은 배우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고현정의 말은 배우에게 배역에 대한 준비가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닐 테고, 다만 그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우가 선입견 없이 마음을 연 상태에서 풍부한 상상력으로 배역에 임하여야 한다는 뜻이었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배우는 어떤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은 상태이어야 주어진 배역을 더욱 창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였으리라. 영화 블랙스완의 주인공 니나는 그 때까지 백조의 울타리에 갇혀 있었고 거기에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관리해 온 어머니가 미친 영향도 있다. 니나는 결국 자신이 갇혀 있던 백조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성과를 이루지만 그 과정은 너무도 힘들고 처절했다.

 

  고현정의 말은 비단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뿐이 아니라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간다. 울타리는 주위 사람들이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국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도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마음을 열고서 항상 상상력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에서의 어떤 배역에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울타리는 선입견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선입견 없이 말랑말랑한 상태는 재판에 임하는 판사들이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영화 “12 Angry Men"은 형사재판에 임하는 배심원들이 피고인에게 가질 수 있는 선입견을 잘 표현한 바 있다. 재판에 임하는 판사는 그 영화에서 배심원중 일부가 가졌던 선입견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항상 말랑말랑한 상태에서 사건과 당사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Posted by 이응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