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수필 나와의 대화

영화 블랙스완을 보았다.

이응세 2011. 3. 7. 01:25
 

  오늘 아내와 함께 영화 블랙 스완을 보았다.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와 흑조에 관한 스토리에서 비롯된 영화이면서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점 외에 자세한 내용을 모른 채 보게 되었는데, 기대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영화는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느슨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다. 상영이 끝나고 많은 관객들이 자리에서 매우 천천히 일어났다는 점에서 여느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 영화가 끝났음을 실감하지 못하기도 하고, 끝났음을 알면서 여운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았다.


  발레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으로 선택되어 연습을 시작한 발레리나 니나는 단장으로부터 자신이 백조의 역할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으나 자신이 소화해야 할 흑조가 보여주어야 할 사악함과 관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니나는 역시 발레리나였으나 딸을 키우기 위하여 그 길을 접은 어머니의 관리를 받으면서 착하고 여린 심성으로 자라온 터라 흑조의 사악함과 관능을 그 내면에서 끌어낼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발레단에 새로 합류한 다른 발레리나가 자유분방하고 관능적이어서 흑조의 역할에 적합하게 보이면서 니나는 주인공 배역을 그녀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영화는 니나와 그 어머니 및 다른 발레리나와의 긴장관계를 주로 담고 있으나 사실은 그 대부분이 니나가 스스로 겪는 심리적인 과정을 담고 있는 것이었는데, 관객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인지 다소 혼란스러운 가운데 영화의 끝을 맞게 된다. 어쨌든 영화는 주인공 니나가 겪은 심리상태를 현실과 함께 섞어 훌륭하게 표현함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시킨 수작이었다.


  발레를 보고 나니 얼마 전에 읽은 신문칼럼이 생각났다. 그 신문칼럼을 보면, 요즈음 한창 뜨고 있는 TV드라마 “사인(Sign)"의 주인공 박신양은 그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100구가 넘는 시체 부검을 참관하고 전국의 법의학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그처럼 철저하게 배역을 공부하는 것은 그의 양심이며,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평생 이 일을 하는지를 모르면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이는 진정 프로다운 자세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럼니스트는 배우 고현정의 연기철학을 듣고 그녀의 연기에 대한 자세가 더 고수라고 느낀 듯 하다. 고현정은 한 인터뷰에서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을 직접 경험해보고, 그 경험을 토대로 연기한다는 것은, 평상시 몸과 마음을 닫아놓은 것이다. 배우는 척추를 다 확장시켜 상상력으로라도 우주와 대화하고, 역할을 맡으면 남김없이 그 사람으로 훌훌 왔다 갔다 한다. 그러려면 선입관이 전혀 없이 열린 상태, 늘 말랑말랑한 상태라야 한다. 좋은 배우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고현정의 말은 배우에게 배역에 대한 준비가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닐 테고, 다만 그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우가 선입견 없이 마음을 연 상태에서 풍부한 상상력으로 배역에 임하여야 한다는 뜻이었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배우는 어떤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은 상태이어야 주어진 배역을 더욱 창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였으리라. 영화 블랙스완의 주인공 니나는 그 때까지 백조의 울타리에 갇혀 있었고 거기에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관리해 온 어머니가 미친 영향도 있다. 니나는 결국 자신이 갇혀 있던 백조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성과를 이루지만 그 과정은 너무도 힘들고 처절했다.

 

  고현정의 말은 비단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뿐이 아니라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간다. 울타리는 주위 사람들이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국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도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마음을 열고서 항상 상상력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에서의 어떤 배역에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울타리는 선입견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선입견 없이 말랑말랑한 상태는 재판에 임하는 판사들이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영화 “12 Angry Men"은 형사재판에 임하는 배심원들이 피고인에게 가질 수 있는 선입견을 잘 표현한 바 있다. 재판에 임하는 판사는 그 영화에서 배심원중 일부가 가졌던 선입견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항상 말랑말랑한 상태에서 사건과 당사자를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