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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인사

이응세 2012. 3. 11. 22:57


이 글은 2012. 2 15. 법원을 사직하면서 퇴임식장에서 말하고, 법원의 지인들께 메일로 보내드렸던 사직인사입니다.

새삼스레 사직인사를 블로그에 올리는 이유는, 이 글을 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는데다가, 이 글이 비록 과거에 대한 인사이지만 미래에 대한 내 자세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 직 인 사


법원가족 여러분들께 법원을 떠나는 마지막 인사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2월 16일자로 법원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1년 3월 제가 법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뒤 어느덧 21년이 지났습니다.

그 21년은 저에게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21년 동안 행복하게 그리고 대과없이 법관생활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일 배우기 바쁘던 배석판사 시절부터 제 주위에는 따뜻하게 저를 이끌어주시면서 법관의 자세를 일깨워주시던 선배 법관들이 계셨습니다.

분에 넘치는 엄청난 권한을 가졌으면서도, 그 권한이 왜 나에게 주어졌는지, 그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여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단독판사 시절을 돌이켜보면, 선배 법관들과 함께 항상 저를 자극하고 일깨워주던 동료법관들이 기억이 납니다.

부장판사가 된 이후에는 배석판사들을 비롯한 후배법관들이 보여주는 진지한 자세와 열의가 저에게 초심을 자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21년 동안 각급 법원에서 함께 했던 재판부 직원분들이 가까운 곳에서 조용하게 저를 도와주고 지켜주셨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성함을 일일이 올릴 수 없지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서 항상 저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던 제 아내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내의 응원이 없었다면 제 법관생활이 과연 행복할 수 있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어부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지 아는가?”

저는 대답했습니다.

“고기를 가득 잡아 만선으로 돌아올 때 행복하겠지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습니다.

“만선의 행복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행복일거야.

어부는 뱃전을 떠나지 않고 뱃전에 머물러 있을 때 행복한 것이라네.

어부가 만선일 때만 행복을 느낀다면 어찌 어부생활을 오래할 수 있겠나.”


그 대답은 제 머릿속을 때린 후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지난 법관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어부가 뱃전에서 행복을 느끼듯이, 저는 법관에게 부여된 권한을 조심스럽게 행사하면서 대체로 행복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제가 얼마나 많은 고기, 얼마나 큰 고기를 잡았는지를 제 행복의 기준으로 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법관으로서 재판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기보다 담당하는 사건의 경중이나 제가 맡은 직책에 더 큰 의미를 두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 깊숙하게 반성했습니다.

비록 뒤늦은 깨우침이자 반성이기는 하지만, 만선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이 깨우침을 저는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법원이라는 큰 배에서 내리려 합니다.

오늘 이후부터 저는 그 동안 법원이라는 뱃전에 머물면서 누리던 그 행복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세상을 더 이상 그 뱃전에서 바라볼 수도 없을 겁니다.

다행히 뱃전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뱃전에서 바라보던 세상을 이제는 물에서 바라보려 합니다. 

파도가 얼굴을 때리고 앞을 가리기도 하겠지요. 

조금은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뱃전에서 바라보는 세상과 물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이 법원에서 배우고 깨쳤던 가치와 교훈들이 앞으로도 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밝은 등대가 되어 주고, 파도치는 물에서도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보도록 만들어 주리라고 믿습니다.


일전에 우리 법원장님께서 ‘떠나는 사람은 자기 뒷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남아 계신 분들에게 보이는 제 뒷모습이 어떠할지를 저는 이제 퇴임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궁금해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제 뒷모습에서 티끌이나 얼룩이 보이더라도 먼저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티끌이나 얼룩이 있음을 애정을 가지고 저에게 일러주시면 더 큰 발전의 계기로 삼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법원가족 여러분

그동안 제게 주신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와 함께 다음에 만나 뵙자는 말씀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 2. 15.


이 응 세 올림